해온호수의 벤치

해온호수의 벤치

대학생이 되고 싶었던 여자

“꿈을 잃은 자리에서, 그녀는 다시 인생을 시작했다.”

스물셋의 한서윤에게는 남들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대학생이 되는 것.

누군가에게는 너무 평범해서 꿈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윤에게 대학은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평생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세상이었습니다.

아침이면 해온대학교 정문을 지나가는 학생들.

책가방을 멘 학생들.

커피를 들고 친구와 웃으며 걸어가는 학생들.

연인의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걷는 사람들.

서윤은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나도 저들처럼 살아보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에게 대학 대신 공장을 주었습니다.


인형에게 얼굴을 만들어주는 여자

서윤이 일하는 곳은 해온시 외곽의 작은 인형공장, ‘꿈나라토이’였습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은 단순했습니다.

눈 두 개.

입 하나.

그리고 다시 눈 두 개.

수백 개의 인형에 얼굴을 만들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윤은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인형에게는 얼굴을 만들어주면서 왜 내 인생에는 아직 얼굴이 없을까?”

공장 안에서는 노동자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외로운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퇴근 후 해온대학교 정문을 지나갈 때만큼은 자신에게 작은 꿈을 허락했습니다.

서윤에게는 작은 금속 배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대학생처럼 보이게 해주는 가짜 배지였습니다.

거울 앞에서 배지를 가슴에 달고 서윤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한서윤. 너 오늘부터 대학생이야.”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현실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꿈을 꾸어볼 용기입니다.


그녀가 매일 호수로 가는 이유

해온대학교 정문에서 조금 걸어가면 해온호수가 나왔습니다.

서윤은 그곳의 한 벤치를 좋아했습니다.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면 세상이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누군가는 연인과 걸어갔고,

누군가는 강아지를 산책시켰고,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웃었습니다.

서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외롭지 않은 척했습니다.

사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대단한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집도 아니었습니다.

비싼 차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

“오늘 하루 어땠어?”

이 한마디를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것.

그것이 서윤이 생각하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어느 겨울밤.

비가 내렸습니다.

서윤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해온호수역 옆 해온시네마로 향했습니다.

영화는 역사 영화였습니다.

혼자 영화를 보던 서윤의 옆자리에 한 남자가 앉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강도현.

영화가 끝난 뒤 도현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역사 좋아하세요?”

서윤은 대답했습니다.

“네.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가 좋아요.”

도현은 웃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영화관 밖의 작은 카페에서 처음으로 마주 앉았습니다.

도현이 물었습니다.

“해온대학교 다니세요?”

순간 서윤의 심장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날 서윤은 작은 거짓말 하나를 품은 채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미래를 바꿉니다

그 후 두 사람은 자주 만났습니다.

영화를 보고,

해온호수를 걷고,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대부도의 바닷가에도 함께 갔습니다.

구봉도의 전망대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도현은 말했습니다.

“나중에 우리도 이런 데 자주 오자.”

서윤에게는 그 말이 너무 좋았습니다.

나중에.

그녀에게 미래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현을 만나면서 미래에 날짜가 생겼습니다.

다음 주 영화.

다음 데이트.

다음 여행.

그리고 어느 날 도현이 말했습니다.

“서윤 씨. 우리 오래 만나자.”

서윤은 웃으며 물었습니다.

“얼마나?”

“아주 오래.”

그날 두 사람은 해온호수의 벤치에 앉아 손가락을 걸었습니다.

평범한 연인들의 약속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서윤에게는 인생 전체를 걸고 싶은 약속이었습니다.


작은 심장

그러던 어느 날.

서윤은 이상한 몸의 변화를 느꼈습니다.

속이 메스꺼웠습니다.

평소 좋아하던 음식도 먹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달력을 바라보던 순간,

서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임신이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행복했습니다.

서윤은 해온호수의 벤치에 혼자 앉아 배를 감싸며 속삭였습니다.

“엄마가 잘 키울게.”

그날 저녁 도현에게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윤의 손을 잡았습니다.

“우리 결혼해요.”

서윤은 울었습니다.

평생 바라던 가족이 자신에게도 생길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남자.

태어날 아이.

그리고 언젠가 살게 될 작은 집.

서윤에게 처음으로 평범한 행복이 현실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준비 없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꿈나라토이의 사정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월급이 밀렸습니다.

거래처의 돈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났습니다.

서윤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곧이어 월세도 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온 서윤은 자신의 원룸 문에 달린 낯선 자물쇠를 발견했습니다.

열쇠를 넣었습니다.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서윤에게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가방 하나를 들고 우체국 쉼터로 향했습니다.

차가운 의자에 앉아 배를 감싸며 중얼거렸습니다.

“그래도 너는 버리지 않을게.”

그 말은 아이에게 한 약속이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한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대학 정문에서 태어난 아이

얼마 뒤 공장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서윤은 다시 일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 길에는 해온대학교 정문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그 문을 바라보며 대학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정문 앞을 지나던 순간,

갑자기 강한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서윤은 기둥을 붙잡았습니다.

지나가던 학생이 그녀를 발견했습니다.

“괜찮으세요?”

서윤은 힘겹게 대답했습니다.

“아기가…”

정문 경비실의 박상철 경비원이 달려왔습니다.

119에 연락했지만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결국 서윤은 경비실 안에서 아이를 출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작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한때 대학생이 되고 싶었던 여자.

대학 정문을 바라보며 자신의 미래를 꿈꾸던 여자.

그녀는 대학생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녀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꿈은 반드시 우리가 생각한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서윤에게 대학은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그녀에게 다른 것을 주었습니다.

사랑을 주었고,

아이를 주었고,

가난을 주었고,

절망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살아갈 이유를 주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릴 때 꿈꾸었던 직업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원했던 사랑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계획했던 인생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꿈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서윤이 그랬던 것처럼.


해온호수의 벤치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과 앉았던 벤치.

혼자 눈물을 흘리던 벤치.

미래를 꿈꾸던 벤치.

그리고 아이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던 벤치.

사람은 떠나도 장소에는 기억이 남습니다.

그래서 해온호수의 벤치는 단순한 벤치가 아닙니다.

그곳은 서윤이 자신의 인생을 다시 시작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모릅니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난 뒤,

도현과의 사랑 앞에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사랑보다 무거운 현실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느 날,

서윤이 처음 혼자 영화를 보았던 바로 그 해온시네마에서

그녀의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다시 시작됩니다.

다음 이야기

제2편 — 사랑보다 무거운 것

사랑은 두 사람을 만나게 했지만,

인생은 두 사람을 같은 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서윤과 도현은 아이를 지키고 가족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서윤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대학생의 꿈과 가짜 배지는 어떤 의미로 다시 돌아오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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